지나간 역사를 재조명하는 과제는 문화민족으로서 대한민국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수반해야되는 과제이다.
지방자치제 도입 이후 지역을 모토로 활동한 인물 및 지명을 재조명하는 각종 발굴 및 학술조사보고회가 심심찮게 언론에 소개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크리스마스 휴일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에 소재하는 수도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수도사 경내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원효대사 깨달음 오도성지 체험관]은 한옥식 건물로 자리하고 있으며, 평택시 소속 해설사까지 근무하고 있었다.
깨달음의 지점에서 민중에게로 몸을 돌리다 란 전시된 내용중 [원효대사와 수도사] 수도사는 원효대사께서 이하 중략 ~ 원효의 유학길은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경주-상주-보은-청주-목천-천안-평택으로 연결된 경로가 있었다. 이하 중략 내용에서 일반적인 교육내용과는 너무나도 차이나는 1400여년전의 상황을 마치 현재 시각으로 재현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지도표시까지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었다.
무슨 근거자료와 고고학적인 발굴 유물이 이곳 수도암지 또는 수도사(852년 염거화상 창건)근처에서 발굴되었는가? 란 의문을 갖고 역사적 사료를 찿아 보았다.
평택시 관련부서 및 관계기관에 정보공개에 의하여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2006년 평택 원효대사 오도성지 학술조사보고서(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IV. 고대 교통로로 본 원효대사의 오도성지 항목 및 결론 및 제언에 의하여」 평택으로 한정, 원효의 유학길을 평택으로 비정한 것이 아닌 확정하여 2017년 개관시 2006년 보고서를 근거로 [원효대사 깨달은 체험관]은 각종 원효 관련 자료에 옷을 입혀 자료를 도식화 전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원효대사 깨달은 체험관]은 2017년 국비 14억5천만원 시비 15억5천만원 등30억원을 들여 개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련내용에 대해 지리적 오류에 대해 평택시청 관련 담당자는 아주오래된 일로서 당시 복원에 참여한 직원들도 모두 퇴직한 상태이며,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서 규명할 수 있는 전문가 자문등에 대해 재검증 및 심사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담당 공무원의 역사인식에 대한 부재함과 오류에 대한 수정을 위한 대책을 요구했지만 아무런 답변이 없는 상태라서 신년 평택시장 기자 브리핑시 시장에게 질의까지 해보았지만 아직까지 어떤 답변도 받지 못한 상태이다.
한편, 원효대사와 관련된 자료를 참고하면 『삼국사기』 권34 지리1 신라강계에서 당은포로(唐恩浦路)기록 자료와 송나라 고승전 『宋高僧傳』 권4 義湘傳에 의하면 원효와 의상이 당으로 유학을 가려고 배를 타기 위해 도착한 곳을 본국해문당주계[本國海門唐州界] 라 기록되어 있다.
송고승전은 988년 송나라 태종시 찬령대사에 의하여 저술된 원효대사 관련 자료중 최고 오래된 사료로 평가되는 사료이다.
송고승전에서 언급한 본국해문당주계에서 현재 당성인근 지역인 마도면 해문리라는 지명이 현존하고 있고 인근 백곡리에는 백제시대 고분군이 존재하고 있는 사실조차 외면한 채 평택 지역 수도암지로 비정한 것도 아니라 평택 수도암지로 확정하여 체험관 건립시 지도표기까지 전시하고 있다.
한편, 지난 2018년 화성 당성 정비사업부지내 유적 발굴조사에서 ‘唐’자 명문이 새겨진 기와 및 ‘新州’라는 기와가 발굴되어 화성 唐城이 7세기이후 통일신라시대 당나라로 가는 무역항으로서 자리매김한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2006년 평택시 의뢰 학술조사보고서 IV 고대 교통로로 본 원효대사의 오도성지 3장 원효대사 오도성지 직산(樴山) 설명부분 송고승전 본국해문당주계라 기록하며 의상은 이곳에서 배를 타고 당의 등주로 들어갔고 원효는 토굴에서 득도를 하여 유학을 포기하고 ~이하 중략, 이어서 890년 제천의 월광사에 세워진 [월광사 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문]에 사즉잠□분비욕구현철 원저직산우(爰抵樴山寓) □□□□급신승원료성도지소야 여기 직산이란 한자를 현재 천안인근 직산으로 추정하면서 이곳이 현재 평택 근처란 이유를 근거 자료라고 제시하고 있는데 너무 빈약한 억측이 아닌가 생각된다.
헌데 비문의 樴山의 樴자는 당시의 지명인 稷자 기장직이 아닌 말뚝樴자를 쓴 것을 어떻게 현재 稷山으로 확정했으며, 기장稷자의 연원을 중국고지명사전에서 산서성 직산현이란 지명은 본래 북위 때 고량을 수나라 시 직산으로 개칭되어진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오늘날까지 당시 1,400여년전에는한반도에는 직산이란 지명이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현재 천안 근처 직산지명은 신라시대 시에는 사산성이 축조되어 이후 고려시대때 지금의 직산 지명이 되었다. 수도사의 창건 또한 852년 염거화상에 의한 것이라고 밝히면서 661년 상황에 대해 누군가 의도적으로 꿰어 맞춘 역사의 지명 오류가 아닌가 생각된다.
앞으로 문화재청과 평택시청의 관련사안에 대한 대책은 강구하고 있는지 지켜볼 따름이다.